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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8년 7월22일 부터 9월19일까지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사용한 청사의 현재위치(동산백원 : 중국 광저우 동산구 휼고원로 12호)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 임시정부 청사의 이동 경로 ㅇ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되어 1945년 11월 국내로 환국할 때까지 27년간 항저우(杭州), 젼장(鎭江), 챵샤(長沙), 광저우(廣州), 포샨(佛山),류저우(柳州), 충칭(重慶) 등지에 머물렀음. ㅇ 특히, 1938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고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이 함락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남성(湖南省) 챵샤(長沙)로 이동하였지만 전황이 급박해짐에 따라 7월 19일 새벽 다시 챵샤(长沙)를 떠나 7월 22일 광저우(廣州)에 도착 ※ 광저우 임시정부 관련 문헌기록 ①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역, 돌베개, 2005, 373쪽~374쪽) “대가족 일행보다 하루 먼저 출발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다. 이전부터 중국 군사 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식, 채원개 두 사람의 주선으로 ‘동산백원(東山柏園)’을 임시정부 청사로 하고, 아세아 여관에 대가족 전부를 수용하였다. (중략) 광주에서 적기 공습이 심하여 대가족과 어머님을 불산으로 이주시키고 00로(판독불가)에 판공처를 설치하고 사무원들만 근무케 하였다. 광주에서 2개월간 머물렀다.” ② 양우조·최선화, 제시일기 (김현주 정리, 혜윰, 1998) 1938년 9월 19일자 “오후 2시 30분 우리 일행은 불산진으로 향했다. 불산은 광주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믿었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연신 대패하며 뒤로 밀렸고, 광동성의 수도 광주의 동산백원에 정착했던 임시정부는 다시 피난을 결정한 것이다.” 2. 광저우임시정부 청사건물은 당초 학계 및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멸실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하였으나, 주광저우총영사관이 광저우시 문화국과 협조하여 청사의 소재지(옛주소 : 휼고원로 35호)를 재차확인하는 과정에서 당해 건물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주광저우총영사관은 임정청사 소재 관련 각종 사료 및 문헌 자료를 광저우시 문화국측에 제공하고 현재 위치 확인을 요청한 바, 2016년 1월말 광저우시 문화국은 휼고원로 35호의‘동산백원’의 現주소가 휼고원로 12호이며, 해당 건물이 현존하고 있다는 답변을 조사 보고서와 함께 송부 ㅇ 주광저우총영사관은 광저우시 문화국과 공동으로 1920-30년대 제작된 광저우시 옛지도를 조사분석하는 한편, 우리 임정청사가 소재했던 동산백원 건물을 1928.10월에서 1929.6월간 사용했던 중앙연구원역사언어연구소측(현재는 대만에 소재)으로부터 1920년대 동 연구소 건물 1층 입구를 촬영한 DVD 자료 등을 입수하여 현재 건물과 비교하는 등 다각적 노력을 기울였음. - 이러한 총영사관의 노력은 해당 건물을 확인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 ㅇ 동 결과에 대해 우리측 유관기관인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팀은 한국측 사료 및 전문가 고증 등 보완작업을 통해 동 보고서에 대한 검증작업을 진행하였고, 2016년 9월말 동 보고서 내용을 보완‧확인하는 내용의 최종보고서를 완료함. - 동 보고서 수령 후 2016년 12월 보훈처 등 유관기관 관계관들이 현장답사 3. 금번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새로 발굴함에 따라 그간 공백으로 남아있던 중국 화남지역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ㅇ 한편,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1938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도 가장 큰 고난의 시기였는바, 광저우임정청사는 동 시기 양국 협력의 역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적지로서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음. 첨부 1.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위치 조사 경과 2. 광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고증조사 보고서(독립기념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