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소식

불꽃처럼 살다간 캄보디아 영화계의 큰별, 리 분 임 감독을 추모하며
구분
문화
출처
KOFICE
작성일
2021.10.27


<이 영화 포스터는 캄보디아 최고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리 분 임 감독이 연출한 고전 영화 12자매 포스터. 그는 캄보디아 황금시대로 불리는 지난 1960~70년대 캄보디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감독이었다. - 출처 :Cambodia Film Commission>

<이 영화 포스터는 캄보디아 최고 영화감독으로 꼽히는 리 분 임 감독이 연출한 고전 영화 12자매 포스터. 그는 캄보디아 황금시대로 불리는 지난 1960~70년대 캄보디아 영화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감독이었다. - 출처 :Cambodia Film Commission>


60~70년대 캄보디아 영화 황금기를 이끈 리 분 임 감독의 지난 삶과 역정에 관한 이야기

프놈펜 포스트를 비롯한 현지 주요 언론 매체들은 유명감독 리 분 임 감독(Ly Bun Yim, 1942~2021)이 지난 105일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캄보디아를 대표하는 또 다른 감독 '마오 아윳(Mao Ayuth)'을 잃은 슬픔을 겪은 지 불과 수개월 만에 이 나라 영화계 최고 감독의 타계 소식을 듣게 된 영화팬들과 영화인들의 충격과 슬픔은 크다.

 

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 크메르르루즈 공산 정권에 의해 몰락하기 전까지 시기를 가리켜 많은 역사가들은 캄보디아 최고의 '황금시대'(Golden Era)라고 부른다당시를 기억하는 많은 기성세대들은 과거 12세기 화려한 고대문명의 꽃을 피었던 앙코르 제국시대에 이어 900년만에 다시 찾아온 제2의 문화부흥기라고 부르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당시 캄보디아는 서양의 문물이 본격 유입되면서 락 음악들이 큰인기를 끌었고서양음악에 영향을 받고 새로 탄생한 크메르스타일의 대중음악밴드와 인기 가수들이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그런 시대였으며영화산업 역시 최고의 문화 비지니스로 부상하며최고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특히 영화산업의 경우 당시 영화광이었던 시하누크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짧은 역사에도 불구빠른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으며이 시기에만 최소 400여 편 이상의 자국산 영화가 쏟아져 나왔다당시 영화관들은 단순한 문화 공간 그 이상의 역할을 했다가난한 젊은 연인들에게는 최고의 데이트코스였고일상에 지친 샐러리맨들에게는 최고의 활력소였으며시골에서 갓 올라온 가난한 젊은이들에게는 잠시나마 고달픈 현실을 잊게 해주는 마음의 은신처였다당시 프놈펜 시내 30여개에 이르는 극장들은 주말은 물론이고평일에도 늘 관객들로 북적이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이 당시 리 감독은 총 21편의 영화를 제작했다그는 연출뿐만 아니라 촬영과 각본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다그가 만든 영화는 16mm 대신 당시로선 매우 귀한 30mm 필름으로 대부분의 영화를 만들어 영화계와 관객들의 주목을 끌었다.


<1970년대 초반 프놈펜 극장가의 모습 - 출처 : Cambodia Documentation Center>

<1970년대 초반 프놈펜 극장가의 모습 - 출처 : Cambodia Documentation Center>


1961년에 만든 그의 첫 데뷔 작품 <선더 패밀리>'SF 가족영화'였다이 영화는 비록 작품의 완성도는 떨어졌지만나름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며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거두었고불과 20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그는 이 영화 한편으로 일찌감치 흥행 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68년 크메르 전통설화를 소재로 다룬 그의 대표작 <12자매>(원제 뿌티센 네앙 콩스라이)는 대성공을 거두며그는 캄보디아 최고 흥행감독으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앞은 평일에도 길게 줄이 섰고입소문을 타고 태국 등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그는 당시 영화 팬들로부터 배우 못지않은 큰 인기를 얻었다영화흥행으로 번 돈을 모아 2개 영화관을 구입해다시 돈을 버는 등 사업수완도 좋아 그는 명예는 물론이고부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되돌아보면 이때야말로 그에게 있어 인생의 정점이자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 '화양연화'의 시기가 이니었나 싶다.

 

하지만그가 십수 년간에 걸쳐 쌓아놓은 명예와 부이 모든 것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그는 공산 정권인 크메르루즈군이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1975417일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그는 그 날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그 해는 평생 번 돈으로 시내 중심가 두 번째 영화관을 인수한 지 약 1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다.

 

그는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이 도시를 점령한 지 이틀째가 되던 날 그는 빈털털이가 된 채 다른 도시민들과 함께 수도에서 100킬로 이상 떨어진 시골의 강제집단노동소로 끌려갔다서슬 퍼런 공산 정권의 감시 속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그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육체노동에 시달리며질병과 배고픔과도 싸워 이겨야만 했다그는 혹시라도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까봐 몹시 두려웠다영화감독이었다는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면즉각 처형도 가능하던 시절이었다당시 유토피아를 꿈꾸던 폴 포트 정권하에서 그들의 가장 큰 주적은 지식인들과 돈 많은 부유층이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과 과거 경력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그는 감시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숨겨놓은 금시계를 몰래 뇌물로 주며 틈틈히 기회를 엿봤다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왔다그는 친해진 중간급 군인들에게 슬쩍 접근해 자신이 도시 이주민들 가운데 일부를 제3의 장소로 이주시키는 비밀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자신은 다시 당의 지시로 프놈펜에 당장 되돌아가야한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군인들은 이 말에 속아 넘어갔고그는 크메르루즈로부터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맨발로 걸어 몇날 몇일을 걸어 캄보디아국경을 넘었고마침내 북쪽 라오스로 도주할 수가 있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그는 곧바로 라오스 공산군 감시병에 붙들리고 말았고 인근 교도소에 이감되었다신문조사를 마친 라오스 군인들은 그를 다시 캄보디아로 되돌려보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그는 또 다시 죽을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때 그는 또 다시 기지를 발휘했다함께 수감되었던 라오스인 한 명이 출감을 앞두자그에게 편지 한 장을 몰래 건네며유엔 현지 지부에 자신이 쓴 편지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그리고 오래지 않아 희소식이 들려왔다편지를 받은 유엔 난민기구에서 라오스군 측에 수감중인 그의 신병 조사를 요청해왔다이제 살았구나 싶었다그는 죽음이 기다리는 캄보디아로 다시 가지 않아도 되었다유엔난민심사관에게 자신을 미국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하지만 그의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대신 한 달여가 지난 즈음그는 자유 진영의 남베트남으로 보내졌다그리고 다시 1년 후 마침 프랑스에 사는 친지와 연락이 되었고, 1977년 태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었다.

 

그로 부터 2년 후인 197917일 잔학무도한 크메르루즈군은 해방군을 자처하며 쳐들어온 베트남군과의 전쟁에서 패했고폴 포트 정권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컸다4년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캄보디아 국민들중 약 1/4이 넘는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6~70년대 리 감독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일했던 영화계 종사자들 가운데 90% 이상이 강제노역에 시달려 죽거나 공개 처형을 당한 뒤였다만약 그 자신도 그대로 캄보디아에 남아 있었다면 같은 운명에 처했을 것이 너무나 자명했다그는 목숨을 건진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당시 그와 함께 영화를 찍었던 수많은 영화제작자들과 콩 삼올 같은 유명 배우들의 불행하고 쓸쓸한 죽음을 애도했다.

 

프랑스에서 8년 여를 머물던 그는 1985년 무렵 새로운 인생 도전을 위해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다그는 평생의 업인 영화 제작 대신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그가 미국에서 시작한 택시 회사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그는 빈손으로 시작해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고내친김에 번 돈을 모아 평생 꿈이던 영상제작프로덕션까지 설립했다그는 당시에도 영화 제작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지만여건이 허락지 않아 일반 영화 제작 대신 기업 CF 광고를 찍으며영화 제작에 대한 미련을 마음속으로 달랬다.


30년만의 고국 캄보디아로의 귀환

1993년 어느 날 아침 그는 조간신문을 읽디가자신의 조국 캄보디아에 마침내 평화시대가 도래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유엔이 주도하는 ‘UNTAC’이라 불리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고그해 5월 캄보디아 전역에서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이듬해인 1994년 미국에서 벌인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캄보디아에 되돌아왔다. 30년 만의 귀환이었다하지만그를 반겨줄 사람들도기억해주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영화제작자들과 배우들은 물론이고그를 아끼던 영화 팬들마저 이미 크메르루즈 시대 죽음의 문턱을 넘었기 때문이다과거 화려했던 영화산업은 명맥조차 완전히 끊겨 있었다오랜 내전 끝에 운 좋게 살아남은 시내 극장 수는 불과 3~4개에 불과했고그나마도 자국 영화는 단 한 편도 없고미국에서 들어온 서부영화와 '스타워즈같은 공상 과학영화들이 스크린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영화 제작 대신영화 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그는 화려했던 6~70년대 영화산업의 황금기를 부흥시키기 위해 모든 재산을 털어 '플래시 다이아몬드'라는 영화프로덕션도 차렸다미국에 사는 캄보디아 동포 친구들과 과거 영화 팬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며 십시일반 성금을 보내왔다그는 2003년에 부처의 삶을 다룬 영화 <갓 정글>을 끝으로 영화감독으로서 은퇴의 길에 들어섰다하지만 이후에도 영화계 젊은 후배들에게 영화와 관련된 제작 기술을 직접 가르치며오로지 평생을 영화만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마지막 타오르는 불꽃처럼 영원히 사라졌다.


<2012년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영화 <12자매>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리 분임 감독을 소개하는 브로슈어 - 출처 : Berlin Film Festival><2012년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영화 <12자매>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리 분임 감독을 소개하는 브로슈어 - 출처 : Berlin Film Festival>

<2012년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었던 영화 <12자매>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리 분임 감독을 소개하는 브로슈어 - 출처 : Berlin Film Festival>


리 분 임 감독이 캄보디아 최고의 흥행 영화 감독이 되기까지...

그는 캄보디아 동부에 위치한 캄퐁참주 출신으로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이름이 중국인의 성을 따르고 있어추측건대오래전 중국에서 온 화교 집안의 피가 섞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그는 어릴 적부터 사진을 찍는 일을 유독 좋아했고미국 국제 NGO단체가 주최하는 사진 공모전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그는 직접 사진을 흑백사진을 현상하고인화를 할 정도로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고 결국 이 같은 취미가 그를 영화감독의 길로 인도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그는 수도 프놈펜으로 올라와 캄보디아 최고 명문 시소왓 고등학교에 편입했다그는 이때 처음으로 불어를 익혔고졸업 후에는 자신의 친형과 함께 프놈펜 시내에 작은 약국을 차렸다당시는 정식 약사 자격증이 없어도 약국을 운영할 수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가난한 자들에게 약을 무료로 주고 주사를 놓아준 덕분에 그의 약국은 늘 손님들로 붐볐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쟁약국에서 인수제안이 들어왔다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단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거액에 약국을 팔았다그리고 그 중 절반은 고향에 계신 홀어머니에게 보내 드리고나머지 돈을 가지고 꿈에 그러던 해외여행을 무작정 떠났다.

 

그가 난생 처음 간 홍콩이라는 나라는 그의 눈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당시 홍콩은 영국령으로 서구 선진문물과 중국의 전통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신생 금융 도시국가로서 모든 것이 풍요롭고 새로웠다고급 백화점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상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우연히 시내 전자매장에서 촬영용 카메라 장비를 발견했다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아무런 주저 없이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남은 전 재산을 몽땅 털어이 카메라를 한 대 샀다.

 

프놈펜에 다시 돌아온 후 그는 이 카메라 한 대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직접 촬영하고 영화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았다그렇게 해서 탄생한 첫 영화가 <썬더 패밀리>였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영화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이후 연달아 여러 편의 영화들을 제작했고 그가 만든 영화들은 줄줄이 성공을 거두었다그의 영화 때문에 다른 영화들이 상영을 못하는 일까지 생기자 그는 직접 영화관을 구입해 다른 영화들이 상영될 기회를 주었다그는 돈보다는 영화를 훨씬 더 사랑했던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절반인 10편의 영화필름은 아쉽게도 크메르루즈 정권 당시 사라져 원본을 찾을 수가 없다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12자매>의 원본 필름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신의 아들 집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이 필름은 크메르어 버전이 아닌 수출용 태국어 버전이라는 사실 빼고는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다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색이 바래고 화질도 썩 좋지 않았다. 2016년 그는 일본의 디지털 복원 전문가 스즈키 노부카즈의 도움을 받아 기존 아날로그 필름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하였다이 영화는 같은 해 일본에서 태국어 더빙에 일본어 자막을 넣은 상태로 일본인 관객들을 상대로 상영되었고 호평을 받았다그리고 이듬해인 2017년 일본 교토대학교와 일본파운데이션의 도움으로 크메르어 더빙까지 성공을 거두었다.


<디지털로 재탄생한 리 분 임 감독의 대표작 ‘12자매’의 시사회 개최 소식을 알리는 크메르 타임즈 기사 장면(2018년) - 출처 : Khmer Times>

<디지털로 재탄생한 리 분 임 감독의 대표작 ‘12자매’의 시사회 개최 소식을 알리는 크메르 타임즈 기사 장면(2018년) - 출처 : Khmer Times>


지난 2018년 열린 캄보디아국제영화제(CIFF)에서 마침내 그의 영화 <12자매>가 캄보디아 괸객들을 상대로 상영되었다무려 50년 만의 재상영이었다이 특별시사회에 포웅 사코나 문화예술부장관을 비롯한 캄보디아 영화계 관계자들그리고 주재 외교관들과 일반 관객들이 대거 참석했다리 분 임 감독은 특별손님으로 이 시사회에 특별 초대되었다. 800여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그가 무대에 노구를 이끌고 등장했다.

 

시사회에 앞서 현지 언론과의 잠시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그는 시사회에 대한 소감을 묻은 현지 기자의 질문에 나는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에게 영화를 가르치길 원했고 그렇게 해왔다그들은 나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영화는 우리에게는 문화와도 같고 우리의 삶과도 같다. 50년 만에 이 영화가 다시 상영된 사실은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사건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리 감독은 자국 영화팬들이 지켜보는 무대에 무려 반세기 만에 다시 올라서게 된 사실에 대해 감동한 듯 눈시울을 적셨다당시 현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통신원 역시 마음 한구석이 짠하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 그와 마주 앉아 그의 삶에 대해그리고 그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지 못한 사실이 후회되고 못내 아쉬을 따름이다진정 영화를 사랑했던 영화인이었으며또한 화려했던 과거 자국 영화산업의 영광을 뒤살리고자 평생을 노력했던 캄보디아 최고의 감독리 분 임을 추모하며...



박정연

  • 성명 : 박정연[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캄보디아/프놈펜 통신원]
  • 약력 : 현) 라이프 플라자 캄보디아 뉴스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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