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도심 한 중간에는 60년 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다. 1930년 템펠호프 공항 바로 옆에 빗물을 저장하려고 만든 유수지. 시민들의 접근이 금지되면서 이곳에는 다양한 동물과 식물, 조류가 자리잡았다. 인간이 설계했지만, 결국 다시 자연이 회복되어 독특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지역 시민들과 환경운동가들이 모여 '플로팅 유니버시티 베를린(Floating University Berlin)'을 만들었다.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급진적이고, 공동체적 공공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지구의 어셈블라쥐' 야외 전시가 열리고 있는 플로팅 유니버시티 베를린>
지난 5월 6일이 생태계 속에 인간과 자연, 사회와 세계의 경계를 이야기하는 야외 전시회 '지구의 어셈블라쥐(Terrestrial Assemblage)'가 개최됐다. 파울리네 도우트레루잉네(Pauline Doutreluingne)와 김금화 독립 큐레이터가 함께 기획한 전시로 전 세계 10명의 작가들이 참여해 각자가 상상하고 고민하는 경계의 이야기를 영상, 설치작품 등으로 구현했다.
전시 측은 '기후, 불평등, 이주가 함께 연관되어 있고, 인류가 살지 못하는 지구에서 인류가 노숙자가 될 위험에 처한 지구 사회적 문제의 시대, 역설적으로 세계에는 더 많은 경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70년간 군사분계선으로 나눠진 한반도처럼 냉전 이후 세계 곳곳은 갈라지고, 경계를 치고, 담을 쌓고 있다'고 설명한다. 기획을 맡은 김금화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인간이 만든 '경계'에서 나타나는 자연적, 생태적 현상과 인간과의 공생, 사회 정치적인 경계 현상 등 다양한 측면을 함께 보여주려고 한다'고 전했다.
베를린 낮 기온이 28도에 이른 지난 9일 온라인으로 사전 예약을 하고 전시회를 방문했다. 햇볕을 즐기려는 나들이 인파를 뚫고 골목길을 따라가다가 숲속 입구로 들어서니 숨겨져 있던 장소가 드러난다. 전시는 사전 예약으로 시간 당 30명까지만 받고 있다. 야외라서 마스크 착용 의무는 없다. 들어서자마자 플로팅 유니버시티 유수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늪처럼 보이지만 장화를 신고 들어서면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느껴진다. 자연 늪지대인줄 알았다가 갑자기 인공성과 부딪힌다. 인간이 만든 곳이라는 게 느껴진다.
<지구의 어셈블라쥐 설치작품>
평소 자연과 이를 모방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이야기해 온 한석현 작가는 유수지의 물을 이용해 다시 구름을 만드는 설치물을 작업했다. 자연의 물로 다시 인공적인 자연을 만드는 순환과 경계를 이야기한다. 2005년 실제 DMZ에서 두 곳의 흙을 파내서 바꿔서 다시 메우는 퍼포먼스를 했던 스페인 작가 산티아고 시에라(Santiago Sierra)의 다큐 영상도 소개됐다. 당시 산티아고 시에라는 남북의 흙을 파서 바꿔 서로 바꿔 메꾸는 작업을 기획했지만, 북한 측의 불허로 남측에서만 작업했다. 다른 곳의 흙을 파서 바꾸어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무의미한 작업을 통해서 '경계'의 무의미함을 보여줬다.
오스트리아 작가인 이네스 도우약(Ines Doujak)은 과거와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종교와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관계를 담은 디지털 콜라주 작품을, 남아메리카의 광물 착취 구조를 이야기해온 베네수엘라 작가 아나 알렌소(Ana Alenso)는 유수지의 물을 이용한 작품 '리퀴드 어그리먼트(Liquid Agreement)'를 선보였다. 다양한 물리적 경계를 넘나들고, 형태를 변화시키고, 약화시키는 물의 가능성, 순환과 산업적인 과정으로 인해 오염된 물이 어떻게 '폭력의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전시장을 한바퀴 돌면서 다양한 공간의, 다양한 형태의, 다양한 방식의 경계를 찾을 수 있다. 이날 플로팅 유니버시티에는 전시회를 보러 온 관람객 이외에도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청소년들도 많았다. 이들은 장화를 신고 오염된 물 위를 뛰어다니며 자연과 생태,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경험한다.
김금화 큐레이터에 따르면 장소 자체가 전시의 개념을 반영한다. 김금화 큐레이터는 '이곳은 늘 환경보호자들과 도시개발의 욕망, 주변 시민들의 욕망이 부딪히는 곳이다. 경계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것은 이런 욕망들과 함께 모순적인 관계를 보여준다'며 '처음에는 코로나 때문에 야외 전시 공간을 찾다가 이곳에서 기획하게 되었는데, 전시를 준비하면 할수록 그런 경계의 상관관계가 극명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플로팅 유니버시티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만들고 경계를 친 덕분에 자연 생태계가 형성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보존과 개발 사이의 가운데서 경계와 욕망이 부딪히고 있다.
※ 사진 출처: 통신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