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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박물관장 아키라를 아시나요
구분
사회
출처
KOFICE
작성일
2021.06.03

전쟁고아로 태어나 크메르루즈 소년병을 거쳐, 대한민국 만해 평화대상과, 《CNN》 선정 세계 10대 영웅까지 선정된 캄보디아 지뢰전문가 Mr. 아키라, 지금 그의 삶은....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지뢰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지뢰 제거 전문가 아키라 씨(52세)<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지뢰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는 지뢰 제거 전문가 아키라 씨(52세)>

 

죽음의 땅으로 불리던 ‘킬링필드’ 시절 전쟁고아로 태어난 그는 아직도 자신의 정확한 출생년도를 모른다. 대략 1970년 쯤 자신이 태어났을 것이라고 늘 말한다. 그렇게 따진 그의 현재 나이는 우리로 치면 52세. 그의 부모는 공산게릴라인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대략 5살쯤 ‘요은’이라는 이름의 여성의 손에 다른 고아들과 함께 크메르루즈 수용소에서 자랐던 어렴풋한 기억만을 갖고 있다.

 

그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은 깊은 정글 속에서의 삶부터다. 불과 열 살 안팎 어린 나이에 그는 또래 다른 소년들처럼 작은 손에 무거운 소련제 AK소총이 쥐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크메르루즈 반군게릴라 소속 소년병 출신이다. 그의 하루일과는 정글 곳곳에 지뢰를 심는 일이었다. 태국과 가까운 캄보디아국경 지역에 주로 대인용 지뢰를 설치했다. 그는 종종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중학생쯤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캄보디아에 들어온 베트남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 군인으로 변신, 군복만 갈아입은 채 또 다시 지뢰 심는 일을 했다.

 

씨엠립 인근 정글 지역에서 발견된 불발탄의 잔해<씨엠립 인근 정글 지역에서 발견된 불발탄의 잔해>

 

1989년 베트남군이 마침내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그는 일자리를 잃었고, 씨엠립 시골 마을을 어슬렁대는 청년 백수로 전락했다. 그러던 차 아키라에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 어느 날 평소처럼 씨엠립 거리를 헤매던 중 푸른 눈의 유엔평화유지군을 우연히 만났다. 그때 나이 대략 스무 살에 가까웠던 때였다.

 

“레슬러처럼 덩치가 컸는데, 이름이 ‘티파키’라는 뉴질랜드 출신 군인이었어요. ‘무서워하지 말라’고 나를 설득하고는,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자기 나라의 멋진 사진들도 보여줬죠.”

 

그 군인은 지뢰를 묻고 제거한 경험까지 풍부한 아키라에게 호기심 가득 찬 눈빛을 보냈고, 곧바로 지뢰 제거 작업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저를 인근 학교에 보내 크메르어와 영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했어요. 이후로 유엔평화유지군과 함께 씨엠립 지역을 다니며 지뢰 제거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물론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누군가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에 너무 좋았고, 행복했어요”라고 답했다. 이후 1993년 유엔평화유지군도 유엔과도정부(UNTAC)도 떠났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사는 마을지역의 지뢰를 제거하는 일에 여전히 매진했다. 아키라는 자신이 어린 시절 전투를 벌였던 지역에 매설된 지뢰들을 제거했으며,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또는 마을 이장이나 농부가 지뢰를 발견했다며 신고를 해왔을 때, 어김없이 달려가 그들을 도왔다. 그는 당시 별도의 전문 장비 없이 오로지 군대용 칼과 막대기만을 사용해 지뢰를 제거했다.

 

“지금까지 아키라 혼자서 제거한 지뢰만 5만여 개가 넘는 것 같아요.”

 

그 외에도 동료들과 함께 제거하고 무력화시킨 지뢰와 폭탄의 양은 수 십 만개에 달한다. 당시 이 나라 정부가 도시개발과 관광지 주변 지뢰 제거에만 관심을 쏟는 사이, 아키라는 110만㎡ 면적의 농지와 숲에서 지뢰를 없앴다. 씨엠립과 인근 지역 32개 마을 1만 여 명이 그 덕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현지정부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키라가 무자격으로 지뢰 제거 활동을 하고 있다며,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자, 2001년 아키라를 교도소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매일 밤 좁고 지저분한 교도소 방에서 쥐떼들과 살았죠. 그렇지만 더 힘든 건 앞으로의 내 미래와 장래에 관한 고민이었어요”

 

2005년은 그에게는 천운이 찾아온 해였다. 그는 운좋게 미국의 자선단체인 'The Landmine Relief Fund'의 도움으로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국제적인 안전기준에 따른 체계적인 폭발물 제거 훈련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호주 참전용사단체인 ‘베트남 참전용사 지뢰제거팀’으로부터도 지뢰 제거 전문가 인증서까지 받았으며, 박물관 전시된 폭발물을 정기적으로 감독 관리하는 지뢰제거관리당국으로부터도 폭발물 관리에 관한 공식 인증서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2008년 20명으로 구성된 ‘캄보디아 지뢰 제거 NGO 단체’까지 창설할 수 있었다.

 

아키라 씨가 자신이 직접 제거한 후 수집한 각종 대인지뢰와 불발탄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아키라 씨가 자신이 직접 제거한 후 수집한 각종 대인지뢰와 불발탄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대인 지뢰나 불발탄의 뇌관을 안전하게 제거한 뒤 남은 잔해 케이스를 집으로 가져와 문 앞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지 거주 외국인 사이에 그의 집에 제거된 지뢰들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났다.

 

“폭탄 잔해물이나 수류탄 껍데기를 직접 구경하거나 구입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마저 생겨났어요. 그렇게 해서 저희 집에 지뢰박물관이 탄생하게 된 거죠.”

 

아키라는 지뢰를 제거하는 일 외에도 부모를 잃거나 지뢰로 장애를 갖게 된 아이들을 20년 넘게 돌봐왔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다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의 아이 40여 명이 그가 운영하는 지뢰박물관 뒤편 생활관 시설에서 함께 살았다. 과거 대부분은 지뢰 희생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신체장애가 있거나 길거리 버려진 아이들, 에이즈 감염자들도 함께 산다. 지뢰박물관 운영 수입은 학교를 가거나 학용품과 옷을 사는 비용 등 이들의 생계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어릴 적 지뢰 때문에 팔과 다리를 잃은 가난한 집안의 한 소년은 아키라의 보살핌 속에 성실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현재는 아키라가 운영하는 지뢰제거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같은 공로로 아키라는 지난 2010년, 미국 《CNN》 방송이 선정한 ‘올해의 영웅 10인’에 뽑히기도 했다. 2012년에는 한국의 〈만해평화재단〉으로부터 평화대상을 받기도 했다.

 

'아카라(AKIRA)'라는 이름은 제 본명이 아니에요. 오래 전 한 일본인이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죠.“

 

그의 본명은 ‘어은 유억’이다. 유엔과도정부 시절 그의 상사 중 한 명인 일본인이 그가 일하는 능력과 효율성을 높이 평가해, 마치 일본의 유명 가전회사 중 하나인 ‘아키라’ 제품 같다고 해서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다. 당시 그는 이 이름이 무척 맘에 들어 했고, 그 후로 줄곧 자신을 ‘아키라’라로 소개해왔다.

 

2010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퍼펙트 솔져(Perfect Soldier, 감독: John Severson)>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나레이션을 통해 아키라가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으며 우울증과 악몽과 감정 기복, 불안에 시달려 이는 그가 군인으로서 경험한 트라우마가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아키라가 TNT 등 화학 폭발물의 반복적이고 만성적인 폭음으로 인해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지뢰박물관은 2008년 씨엠립 시내에서 지금의 장소를 옮겨 새롭게 문을 열었다. 《CNN》이 선정한 영웅으로 뽑혀, 국제사회의 주목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이후 많은 국제자선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동안 결코 순탄치 않았다. 2000년 결혼한 조강지처 아내는 셋째 딸을 낳은 뒤 급성 감염성 질환으로 2009년 세상을 등졌고 이로 인해 그는 현재 두 아들과 딸 등 세 아이들을 혼자 키우고 있다. 게다가, 캄보디아 정부당국은 그의 활동을 좋게 보지 않았다. 도움과 협조는커녕 그동안 여러 차례 이 박물관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난 2018년에는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내에 불법 폭발물을 전시 보관했다는 정부 당국의 주장으로 긴급 체포당하는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이 같은 폭발물을 전시 보관할 수 있는 권한과 관련 허가 서류가 부족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로 말미암아 3개월간이나 박물관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어렵게 정부 허가를 받아 다시 문을 열었지만, 지난해 초 갑작스레 터진 코로나 바이러스가 또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박물관이 영업을 중단하자, 입장료 수입으로 근근히 운영되던 생활관 역시 문을 닫은 상태이며, 이곳에 살던 고아들과 장애인들은 주 정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로 옮겨진 상태다.

 

아키라 씨와 팀원들이 그동안 캄보디아 정글에서 찾아내 제거한 대전차용 지뢰들의 모습<아키라 씨와 팀원들이 그동안 캄보디아 정글에서 찾아내 제거한 대전차용 지뢰들의 모습>

 

기자가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간 이 날도 아키라가 십 수년째 운영해온 지뢰박물관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1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아키라는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허름한 군복을 입은 채 어린 고아들과 함께 씨엠립 시내를 누비던 그의 모습이 조금도 생생히 기억났다. 비록 나이를 속이지 못해 이마에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밝은 표정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의 안내로 빈 박물관을 들러봤다.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긴 박물관 전시관 구석구석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지뢰로 인해 팔다리를 잃었지만 그의 도움으로 성장해 지금은 지뢰제거단원으로 활동 중인 한 청년의 사진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그는 2012년 한국 ‘만해평화재단’으로부터 받았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며 자랑하기도 했다. 한국의 불교단체들도 종종 방문해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힘들어진 상태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난 2012년 대한민국 만해평화대상에서 '평화대상'을 수상했을 당시 받은 기념 상패. 현재 이 박물관내에 전시되어 었다<지난 2012년 대한민국 만해평화대상에서 '평화대상'을 수상했을 당시 받은 기념 상패. 현재 이 박물관내에 전시되어 었다.>


혹시 정부로부터 어떤 재정적인 도움을 받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단호히 ‘노’라고만 대답했다. 박물관 뒤편 생활관도 조용했다.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 몇 명과 어린 아이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이끄는 지뢰제거NGO 단체도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간신히 운영 중이다. 그는 “코로나가 끝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라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20년 넘게 죽음 힘든 순간과 고비를 넘긴 그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박물관을 모두 둘러본 뒤 그와 기약 없는 만남을 약속했다. 차창 밖으로 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캄보디아는 내전이 본격화된 1965년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캄보디아는 전국에 지뢰 1,000만 개가 무차별적으로 뿌려졌다. 지금도 400만~600만 개의 대인 지뢰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잠정 문을 닫은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외부 전경<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잠정 문을 닫은 캄보디아 지뢰박물관 외부 전경>


※ 사진 출처 : 통신원 촬영




박정연 통신원 이미지

  • 성명 : 박정연[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캄보디아/프놈펜 통신원]
  • 약력 : 현) 라이프 플라자 캄보디아 뉴스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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