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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원로 MC 겸 딕패밀리 비둘기 가족 멤버 지미 김 씨
구분
문화
출처
KOFICE
작성일
2021.05.20

지미 김(김태웅 82세) 씨는 한국의 1세대 DJ 중 한 명이요, MC로 활약하다가 딕패밀리, 비둘기가족 등 밴드의 보컬로 데뷔했었던 가수이기도 하다. 44년 전 미국에 건너온 이후에도 여러 라디오와 TV 채널을 통해 미주 동포들을 만나왔고 한국 연예인의 미주 순회공연을 여러 차례 기획하기도 했다. 지난 4월 말, 한인타운의 카페 더반에서 살아 있는 한국 연예계의 증인, 지미 김 씨를 만났다.

 

지미 김이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셨나요?

저는 1939년생으로 올해 82세가 됐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6.26 한국 전쟁을 모두 직접 경험했습니다. 지미라는 이름은 제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부터 사용해왔던 아명입니다. 어릴 때 마리앤이라는 외교관 부인과 알고 지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태웅이라는 제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지 저를 지미라고 부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 연예계 활동을 할 때도 예명으로 지미 김을 그냥 사용했던 거죠. 당시 연예계에는 패티김, 모니카유, 위키리 등 미국식 이름의 연예인들이 드문드문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 1세대 DJ 중 한 분인 최동욱 씨와도 함께 일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디제이 활동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대학에 입학한 후 팝송을 좋아해 원판을 구입해서 듣곤 했었어요. 좋아하는 음반을 학교 앞 음악 다방에 가지고 가서 틀어주는 날들이 점차 늘었죠. 그랬더니 그 다방에 가면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서 멀리 영등포에 사는 사람들도 음악을 들으러 혜화동까지 오곤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스카웃이 되어 음악감상실에서 음악을 틀게 된 것이죠. 당시만 하더라도 DJ라는 명칭이 아니라 음반을 튼다는 의미에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플레이어(Player)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음악감상실은 상설 무대 라이브 연주가 금지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사람들은 라이브 무대를 보고 싶어했었죠. 그래서 음악감상실의 취약점을 보강한 뮤직살롱이 등장한 것입니다. 퇴계로 2가에 있던 콘티넨탈 호텔의 뮤직살롱이 그 시초였는데요. 미8군에 출연하던 연주자와 가수들이 주 무대를 꾸몄습니다. 이어 미도파 백화점 4층의 미도파캬바레가 낮 시간에 미도파쌀롱을 열면서 최동욱 씨와 함께 제가 MC로 일했었습니다. 당시 숙명여대 재학생인 박인희 씨도 이곳에서 사회를 봤습니다. 곧이어 소공동 경향신문 옆 골목에 문을 연 ‘라스베가스’라는 곳에서도 최동욱 씨와 공동으로 MC 일을 했었습니다. 한편 태평로 3가 조선일보에서 개설한 아카데미 극장 2층 아카데미 감상실에서도 제가 DJ로 일했어요.

 

대규모 공연의 MC도 많이 하셨다고요.

네. 제가 그렇게 여러 공연의 MC로 활약할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도 영어 한 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던 시절이었죠. 실전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팝송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영어 노래 제목의 발음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공연과 행사의 MC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죠. 당시 시민회관에서 있었던 서독 서커스단 공연, 인도 마술단 공연 등 굵직한 공연의 MC도 제가 했었습니다.

 

가수로도 데뷔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얘기 좀 들려주세요.

MC로 진행을 하는 행사가 주로 가수와 음악 밴드의 공연이잖아요. 키보이스와 신중현 악단 등이 활동하던 시절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지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나도 가수를 해야겠다 싶어 직접 결성한 팀이 딕패밀리였습니다. 저는 보컬을 맡았었죠. 제가 딕패밀리 멤버였던 시절에는 주로 유명한 팝송의 가사를 번역해 녹음한 번안곡들로 앨범을 꾸몄었습니다. 딕패밀리를 하다가 다시 MC 활동을 하기 위해 탈퇴했는데 그 이후 딕패밀리는 <나는 못난이>, <또 만나요(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등 빅히트 곡들을 발표하죠. 당시만 하더라도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또 만나요>는 모든 음악다방에서 밤 11시 30분경에 흘러나왔던 노래였어요.

 

그 후에도 다시 한 번 다른 그룹으로 음반을 내셨었죠?

네. 그룹하던 친구들이 다시 음악을 하자고 제안해서 ‘비둘기 가족’ 또는 ‘비둘기 구룹’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냈어요. 그때 수록된 노래가 <하얀 비둘기>인데 제법 방송에도 많이 나갔고 음반도 팔렸었습니다.

 

패키지 쇼의 기획자로 일하게 된 사연은요?

제가 딕패밀리 활동을 할 때, 미8군에서는 ‘패키지 쇼’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옛날 가수들은 거의가 미8군 출신이에요. 패키지 쇼는 밴드의 노래 공연에 무용, 코미디 등 여러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1시간 반 길이의 쇼였어요. 당시 무대가 있는 극장식 바인 ‘비어홀(맥주 홀)’이 매우 인기 있었는데 미8군 패키지 쇼를 비어홀에서 해보면 좋을 것 같더군요. 그래서 그런 패키지 쇼를 만들어 비어홀에 올렸는데 대성공이었습니다. 그후 여러 차례 패키지 쇼를 기획했었죠.

 

패션 모델의 경력도 있으시다고요?

당시 최초로 ‘황실’이라는 남자 모델 클럽이 창설됐는데 그곳의 멤버로 도신우, 이재현 등의 동기들과 함께 패션쇼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런데 런웨이에서 워킹을 했던 건 딱 한 번이었어요. 패션쇼에도 MC가 필요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당장 눈앞에 있는 저더러 MC를 보라고 해서 다시 MC 일을 했습니다. 당시 국제복장학원, 뉴스타복장학원 등에서 주최하는 여러 패션쇼 사회를 주로 봤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오신 계기는 무엇인지요?

조지아 아틀란타의 언론사에서 일하던 지인이 패키지 쇼로 미주 동포 위문공연을 한 번 하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래서 가수 현미, 박상규, 송대관, 김화정 등으로 멤버를 꾸려 한 달간 미 전국을 돌며 위문공연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 위문공연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가장 큰 규모로 구성했던 팀은 16명 규모였어요. 배삼룡, 이순주, 가수 이상렬 등이 그때 한 팀이었는데요. 공연을 마치고 나니 16명 중 10명이 미국에 남겠다고 하고 6명만 귀국한 거예요. 당시에는 위문 공연단 등 단체의 신원조회는 중앙정보부에서 하던 시절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주저앉다 보니 더럭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한국 가는 것을 포기하고 미국에 살기 시작한 것이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20년은 뉴욕에서 20년은 LA에서 살았습니다.

 

뉴욕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뉴욕에서 뭘 할까, 하며 신문을 뒤적이는데 “미국 여성들이 가장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성의 직업 1위가 항공기 조종사”라는 기사를 보게 됐어요. 항공기 조종사의 가족들은 1년에 2차례 어디로든 여행을 갈 수가 있어서더군요. 그래서 관광회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적성에 관광지를 찾아다니고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일이 딱 맞더라고요. 그때 제가 개발한 관광상품들은 현재 미주 지역 거의 모든 여행사의 스탠다드 상품이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하셨죠?

뉴욕에 라디오코리아가 들어서서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게 됐는데요. 제가 모든 진행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그 시절 그 노래>라는 가요 프로그램을 2년 반 동안 하게 됐습니다. 추억의 노래들을 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시니어들의 아이돌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어느덧 뉴욕의 모든 노인회 행사의 MC를 도맡아 하게 되었어요. 제가 직접 라디오 방송시간을 사서 <라디오 뉴욕>을 운영하기도 했었는데 경영이 서툴러 6개월 정도밖에 하지 못했어요. 그 후 LA로 여행을 왔다가 <한미방송>에서 프로그램을 하자고 해서 1988년도에는 LA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때 1년 넘게 <토요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그 후 《주간현대》라는 주간지도 인수해서 운영했었죠.

 

뉴욕과 LA에서 하셨던 공연 기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뉴욕 시절, 여행사일, 방송과 함께 쇼비즈니스도 했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트로피카나 호텔이 애틀랜타 시티에 오픈했는데 3,300석 규모의 극장을 넣은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서 패티김 쇼를 기획했습니다. 3,300석이 모두 꽉 차는 대성공을 거두었어요. 그 후 나훈아, 조영남, 최성수도 초청해 콘서트를 열었어요. LA에서는 김수희, 태진아 쇼를 했습니다.

 

정말 다양한 인생을 살아오셨네요. 그 가운데 어떤 일이 선생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말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취미가 일로 연결된 것이죠. 가장 많이 했던 일은 MC와 쇼 기획이지만 제가 가수 활동하던 때는 흑백 TV 시절이었던 터라 한국의 칼라 TV에 가수로 출연해보는 것이 꿈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가요무대> 제작팀이 저를 초대했는데 코로나 펜데믹이라 못 나가고 있어요. 이제 백신도 맞았으니 조만간 그 꿈을 이룰 수 있겠죠.

 

요즘 케이팝 등 한류가 미국 주류사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많이 부럽죠. 그것은 또한 미국 내에서 한국인의 정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미국에는 전 세계 150개국의 관광청이 들어와 있어요. LA에만도 70여 개국의 관광청이 있습니다. 그 관광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적 위상이 높은 것을 알고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을 할 때 저를 찾습니다. 관광청 행사 코디네이터로 오랜 시간 일했었네요. 그들로부터 BTS와 한국 드라마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내 모국의 문화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낀답니다.


한인타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지미 김 씨 - 출처 : 통신원 촬영 <한인타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지미 김 씨 - 출처 : 통신원 촬영>

 

지미 김씨가 보컬을 맡아 음반을 낸 비둘기 구룹 - 출처 : 지미 김 씨 제공<지미 김씨가 보컬을 맡아 음반을 낸 비둘기 구룹 - 출처 : 지미 김 씨 제공>

 

패키지 쇼 공연단과 함께 한 지미 김 씨 - 출처 : 지미 김 씨 제공<패키지 쇼 공연단과 함께 한 지미 김 씨 - 출처 : 지미 김 씨 제공>




통신원이미지

  • 성명 : 박지윤[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미국(LA)/LA 통신원]
  • 약력 : 현) 마음챙김 명상 지도자. 요가 지도자 전) 라디오코리아 ‘저녁으로의 초대’ 진행자 미주 한국일보 및 중앙일보 객원기자 역임 연세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졸업 UCLA MARC(Mindful Awareness Research Center)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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